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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유래/설화전설

다부리

다부리
자연부락명 유래
「다부 · 다부리
· 다부원」
이 마을 사람들이 너무 가난하였기 때문에 부자가 되는 것이 소원이라 마을 이름이 라도 다부라고 짓자 하여 다부라고 하였으며 그 후 역촌이 되면서부터 골원이 행차시 인동을 거쳐 다부원에 머물렀다 하며, 이 마을의 부자들이 접대를 잘 하였다 하여 현 동명이 지어 졌다고도 한다. 진목정 옛날 고을 원이 행차시 쉬어 간 곳이며 당시 동제 목인 참나무 그늘이 좋아서 등짐 장사들이 쉬었다 가면서 지은 동리 이름이다.
거문장이·거문간 옛날에는 마을 뒤가 입구였다고 하여 신라시대의 초소였던 큰 문이 있었다 하여 현재의 동명이 지어졌으며 동네에 살고 있는 파평 윤씨 문중은 임진왜란시 피난하여 입주한 씨족이다. 유전리. 옛날에는 오목곳이라 불렀다 하나 그 유래는 알 수 없고 다부원 남쪽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금화리

금화리마을유래
자연부락명 유래
「금화 · 금화리」 광산에서 약 3㎞ 아래에 위치한 마을로 광산이 한창 성할 때 새로 생겨난 마을인데 동리 이름도 광산에 연유하여 지었다고 하며 지금은 40가구 정도의 마을로 변했다.
「수청거리·수청·소이리·소흘리」 옛날 이름은 소흘리였으나 음의 변화에 의하여 소위리라고 불리어졌으며 물이 맑고 물맛이 매우 좋아 수청이라고 고쳤다.
「진번덕·진번디기
·진번득·진버드기·진동」
갈매기 산 골짝 이는 두 가구뿐인 마을이다. 이 곳은 가산 산성을 올라가는 북쪽 입문으로 사방을 환하게 뚜렷이 살펴 볼 수 있는 수자리이기 때문에 진번드기란 마을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전에는 여기에 널따란 늪이 있었으나 지금은 밭으로 되어 버렸다.
「새뜸」 국도가 개통되기 이전에는 본동이었으나 수청거리란 마을이 생긴 뒤로 호수가 줄어 10여가구 살다가 현재는 1가구도 없다. 그리고 그 마을 자리가 금화못으로 바뀌었다.
「절골·사곡」 갈매기산 깊은 골짜기에 예부터 금곡사가 있었는데 6·25동란때 파괴되고 그 뒤 중수하였으며 2가구의 마을이다.

가산리

가산리 지명유래
자연부락명 유래
가산·가산리 지역의 큰 산성 밑이 되므로 가산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산당 · 대둔 · 북창 일부를 병합하였다.
한듬·대둔 골짜기가 깊으며 아담하고 한가로운 큰 언덕이 있으니 이 곳을 이름하여 한듬 또는 대둔이라 하였다.
바깥한듬 깊은 골짜기에서 바깥 쪽으로 넓은 언덕이 마당처럼 펼쳐 있어 바깥한듬이라 부른다.
북창 조선조 인조 18년 군량미 보관창고로 활용하기 위해 북쪽에는 북창, 남쪽에는 남창을 두었다고 하는데 이를 이름하여 북창이라고 부른다.
산당 높은 산꼭대기에 숲이 마당처럼 둘러 싸여있는데 이곳을 산당이라 부른다.
웃산댕이·상산당 높은 산꼭대기에 높이 마당처럼 펼쳐 있으며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내려 볼 수 있다 하여 웃산댕이 이라고 부른다. 산마루 아래쪽은 아래산댕이 또는 하산당이 라고 한다.
안하듬 마을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 안쪽이며 크고 넓은 언덕이 마당처럼 펼쳐진 곳이므로 안한듬이라 칭하게 되었다.

응추리

응추리 지명유래
자연부락명 유래
양지가라골·양추리 남으로는 팔공산 · 서는 가산 산성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길게 뻗은 깊은 산골짜기에 대구와 응추리를 왕래하는 교통의 종착지이며 시발점이기도 하다. 옛날 가라골의 양지 바른 쪽을 가리켜 양지가라골 또는 양추리이라 부른다.
가라골 옛날 큰 가래나무가 서 있었고 이 근처의 산들이 사냥하기에 좋을 뿐아니라 주위가 아름다워서 해마다 가을이 되면 사냥군들이 몰려 와서 이 큰 가래나무 아래서 산수를 즐겼다고 하는데 이 나무의 이름을 빌어 가라골이 되었다.
음지가라골·음추리 양지가라골에서 북으로 2㎞지점에 20호의 주민들이 농업에 종사하며 과수원 경영에 힘쓰고 있다. 산이 높고 골짜기가 깊어 하루 중 햇빛 드는 시간이 짧아 대부분 음지다. 이를 가리켜 음지가라골이라 한다.

용수리

용수리 지명유래
자연부락명 유래
목정 남북으로 길게 펼쳐있는 용수리의 최남단에 32가구로 이루어진 자연 부락으로 농사가 주업이며 북서쪽에는 가산 산성이 우뚝 솟아 이 마을을 지켜보고 있다. 옛날 이 산성 아래쪽 두메에 큰 고목이 있었는데 이것을 베어 정자를 짓고 이 정자 이름을 고목정이라 하였는데 마을 이름도 이 고목정에서 나온 것이다.
고묵은터·구지·용곡 용수리 행정구역 중에서 가장 오래된 곳이며 옛날 이 지대의 생김새가 흡사 용이 웅크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이 곳에 마을이 서자 이를 일컬어 묵은터·고지 또는 용곡이라고 하였다.
복고개·복현 이조 선조 때 왜군이 우리나라에 침입하여 이 복고개를 넘어 갈 때 많은 피난민들이 이 고개의 남쪽에 있는 깊은 골짜기에 엎드려서 무사히 피난을 하였다. 이 골짜기에 엎드린 사람들은 고개에서 아무리 살펴보아도 보이지를 않는다고 한다. 그러기 때문에 복고개 또 복현이라 부른다.
용계 용곡리에서 살던 용이 이 마을 앞에 있는 깊은 골 냇물에 와서 목욕을 자주 하였는데 나중에 사람들이 이 부근에 와서 살게 되고부터 용을 극진히 섬기게 됨으로써 마을 사람들은 많은 소원을 성취하게 되었다고 하며 그 후 용은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여 이 마을 명을 용계라고 하였다.
김남정이·김나무진 용계 서쪽산비탈에 크고 작은 많은 개암나무가 지금도 많이 서 있는데 옛날 큰 개암나무로 우아한 전자를 지었다고 하며 그 후 이 마을의 크고 작은 행사와 놀이는 여기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를 김남정이 또는 김나무진이라 부른다.

천평리

천평리 지명유래
자연부락명 유래
아랫마 가산리 사무소가 있는 조그마한 마을로 웃마아에 대하여 한천 하류에 위치한다 하여 아랫마아라고 하며 삼거리쪽에 위치하고 있다.
「양지뜸·양지」7, 8가구의 작은 마을로 양지 바른곳에 자리 잡고 있어 양지뜸이라 한다.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동명이다.
웃마아 옛날에는 큰말골짜기라는 별명이 있다. 50가구 정도의 마을로 북쪽에 가산 초등학교가 있고 한천 상류에 위치한다.
「새술막·신주막·천평삼거리·삼거리·천평」옛날 천평 앞산 밑에 있었는데 현재는 없어지고 도로변에 나와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옛날 대구, 상주, 의성 행로로서 대구에서 하룻길이므로 이 곳에서 일박하였기에 새술막이라고 하였다고 하며 이곳이 폐쇄되자 삼거리 또는 천평이라 부르게 되었고 지금도 대구, 안동, 상주 행로의 삼분기점으로 되어 있다.
새터 삼거리에서 서쪽으로 약 500m 떨어진 곳에 새로잡은 곳이라 하여 새터라고 불러오고 있으며 양계와 과수단지로 알려지고 있는 작은 마을이다.
「샘들·천평리」 아랫마아 앞들을 말하며 이 들에 샘이 많이 있어 옛부터 한해를 모르는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2가구가 살고 있다

심곡리

현재 행정 동명인데 바끗마, 중사리, 타꼬, 섬뜸 등을 총칭하여 심곡리가라 하며 마을이름을 심곡이라 한 것은 그 유래는 알 수 없다. 이 마을 전부가 냇가에 있으며 하천의 재방을 튼튼히 쌓고 재방내 하천에 과수원을 경영하여 주민들의 생계가 향상되고 있다.

심곡리 지명유래
자연부락명 유래
바끗마 이 마을은 중사리의 일부 마을인데 중사리 밖에 있다하여 불리워졌으며 위치가 강변인 관계로 토질이 모래가 많아 주민의 생계가 곤란하였으나 근년에 와서는 과수를 많이 재배하여 생활이 점차 윤택해 가고 있다. 「중사리」이 마을은 뒤에는 산이고 앞에는 내가 흐르고 있는데 냇가에 모래사장이 멀리 뻗어 있어서 뒤쪽을 상사리라고 불러 왔다.
현재는 그 모래밭이 과수원으로 되어 있다.
타꼬·탑곡 옛날에 이 마을 뒷산 고개에 탑이 있었다 하여 탑곡이라 하였는데 타꼬로 마을 이름이 된 것은 어느 때부터인지 알 수 없으며 지금은 탑은 없고 그와 같은 유래만 전해 오고 있으며 주민은 전씨, 이씨, 박씨 등 각성이 약20가구정도 살고 있는데 전씨가 주성이다. 「섬뜸」이 마을은 중사리 아래쪽에 있으며 타꼬 앞 냇가에 있는데 여러 마을에서 뚝 떨어져서 섬같이 되어 있다 하여 섬뜸이라 하였으나 지금으로부터 60여년 전에 큰 홍수로 마을이 없어 졌다가 근간에 3가구 과수원을 경영하면서 살고 있다

학하리

학하리 지명유래
자연부락명 유래
감실·감곡 감나무가 많기로 유명했으며, 현재도 감나무가 많다.
고내미·고남리 유학산에서 천생산선으로 내러간 선등을 옛날 이 여공이 끊고 그곳에 못을 팠는데 못을 팔 때 파낸 흙무더기가 큰 두던이 되었고, 그 두던 남쪽에 마을이 있다. 하여 고남리이라 불리어 오면서 고내미로 변했는데 주민 중 천씨가 주성이다.
돌작골·석사리 유학산이 있는 학림정 우측 위에 석사란 절이 있어서 석사리이라 하여 왔는데, 오랜 세월이 자나는 동안 차차 말이 변해 돌작골로 되었으며, 각성이 사는데 천씨가 많다.
들소복·소복리 이 마을 본명은 우동인데 마을 뒷산이 거우형이라 해서 나온 것이나 후일 소의 배 앞이라는 뜻으로 소복이 또는 서고이라 불러온다.
조산백이·조산 소복이 앞 작은 산인데 소복이 마을뒷산이 거우형인 고로 소 앞에는 풀이 돋는 산이 있으면 좋다 하여 주민이 모여 흙을 모아 만든 작은 산이며 옛부터 집은 없었다.
지금소복이·지금촌 주위를 통틀어 소복이라 하는데 이 마을은 지금산 밑에 있다 하여 지금소복이라 하였다.

학상리

학상리 지명유래
자연부락명 유래
노갱이마을 노갱이 마을 앞에 내가 있는데 이 내 이름이 노갱이라 해서 마을 이름을 노갱이라 불렀으며 노갱이 냇물에 흠을 달아 논에 관수를 한다 해서 흠길물이라고도 불리워 졌다고 한다. 그러나 마을 이름은 계속 변함이 없다.
들마·들마을 노갱이 마을에서 좀 떨어져 들 한가운데 있다하여 들마라고 불리었다. 이 마을에는 장씨·이씨·김씨등 각성이 살고 있는데 장씨가 주성이며 토질이 비옥해서 주민의 생계가 비교적 풍족한 편이다.
사부테·사부동 이 마을에는 경부 김씨가 20가구 정도 살고 있는데 옛날에 경주 김씨 사부공이 이곳에 피난을 와서 살았기 때문에 그 후손이 아직 살고 있으며 사부공의 호를 따서 지명이 되었다고 한다. 사부동이 사부테로 변한 것은 어느 때부터 인지는 알 수 없다.
칠송징이·칠송정·칠송동 옛날에 이 마을 앞에 큰 소나무가 일곱 그루가 있어서 칠송정이라 불렀다고 한다. 칠송정이 칠송징이로 변음되었다. 현재는 한 그루의 큰 소나무가 외롭게 서 있을 뿐이다.
토실·토곡 이 마을은 학상리에서 하판리으로 넘어 가는 고개를 약간 못 가서 우측 골짜기에 있는데 옛날 어떤 사람이 이곳에 피난을 와서 흙으로 집을 짓고 살았다 해서 후세 사람들이 이곳을 토실이라 전해오나 토질과 수질은 나빴다고 한다

학산리

둠터·둠티·둔현·학산·둠·덤이 많다 하여 동명이 둠터로 불리어 왔으며 학이 많이 날아오던 마을이라 하여 학산리가 되었다 한다. 일제 시대에는 이 동리가 석적면에 속하였으며 동네의 반수가 넘는 해주 최씨 문중은 임진왜란 때의 피난민의 후손이라고 한다.

학산리 지명유래
자연부락명 유래
장대고개·당대고개·장현·당현 옛날 성황당이 있던 고개라 하여 오늘의 동명이 지어졌으며 당시 신행 가마가 지날 갈 때 옷가지를 걸었던 곳이라 전해지고 있다.
원정·원증 옛날 군수가 쉬어간 곳이라 하며 동네에 많이 살고 있는 안동 권씨 문중은 임진왜란 당시 피난민의 후손들이라고 한다.

석우리

架山面(가산면) 소재지에서 北(북)으로 약 2㎞ 지점에 위치하며, 마을 곳곳에 돌이 많이 쌓여있어 돌모리 또는 石積(석적), 石隅洞(석우동)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선산군 長川面(장천면)에 편입되었다가 1987년 1월 1일 대통령령 제12007호로 가산면에 편입되었다.

석우리 지명유래
자연부락명 유래
아시뱅이·雅士坊(아사방)·雅洞(아동) 金貴連公(김귀연공)은 死六臣(사육신) 金文起(김문기)의 후예로서 世祖以後(세조이후) 隱居(은거)해온 가문인데, 金公(김공)은 自己(자기)가 故鄕(고향)을 떠나 이 곳에서 「아시살이 할 수 있는 第二(제이)의 世居地(세거지)」라 해서 「雅士方(아사방)」으로 同名(동명)을 命名(명명)했다고 하며, 약 300여년전에 設村(설촌)되었다.
부처골·佛洞 (불동) 아사방에 정착한 金寧金氏(김령김씨)들에 의해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며, 옛날 이 곳에 寺刹(사찰)과 佛像(불상)이 있었다해서 부처골 혹은 佛洞(불동)이라 했다.
송촌·홍계 약 120년전 韓末(한말)때 恩律宋氏(은율송씨)가 이주·정착함으로써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는데 宋氏(송씨)들이 살고 있는 동네라해서 宋村(송촌)이라 했으며, 또 옛날 人家(인가)가 드물 때 이곳에 기러기떼가 많이 놀았다해서 鴻溪(홍계)라고도 했다.
돌모리
(石隅(석우)·石積(석적))
마을 근처에 돌이 많아 石積(석적)이라 하였으며, 처음엔 돌모루라고 부르다가 점차로 音(음)이 變(변)해 돌모리 또는 石隅(석우)라 하였다. 약 350여년전에 慶州李氏(경주이씨)가 정착하면서 설촌되었다.
신방이·新坊(신방) 돌모리이 北西(북서)쪽에 있는 마을로서 새로 생겨난 마을이라서 이를 新坊(신방)이라 했다 한다.
달분이·달분 由來(유래)는 月分(월분) 마을에 앞산이 있는데, 이 산의 東(동)쪽에서 달이 떠서 앞산을 지나 西(서)쪽에서 다시 달이 나타나 洞名(동명)을 月分(월분)이라 하였다 한다.

송학리

송학리 지명유래
자연부락명 유래
달밭들 · 달전동 · 월전동 들 복판에 있어서 아랫너실 북편 들을 달받들이라 부르고 이 동편 군위 행로의 고개를 달불재 · 달분재라고 부른다.
봉담 · 봉림 유학산 밑에 위치한 마을로 옛부터 숲이 우거져 있으며, 위봉사가 있었는데 폐찰되었다가 새로 지은 절이 있다.
웃너실 · 상판 빗발고개 넘어 유학산 산마루에 있으며 대구 · 선산 통로의 국도 서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옛날에는 재목감의 큰 나무가 많았다.
아랫너실 · 판고개 · 하판 빗발고개 아래 대구 · 선산간 국도 동편에 위치한 마을로 오래 전부터 영천 이씨가 주성을 이루고 있으며 영천 이씨의 제주판관공과 송강제가 있고 제주판관의 며느리가 혼인 전 죽은 남편의 영혼과 혼례를 치르고 수절하다가 친가의 재혼 권유에 이기지 못하여 자결하였는데 이 소식을 전해들은 임금님께서 하사하였다고 하는 열녀홍문이 마을 뒤에 있다.
오모기 · 오미기 · 오향 마을 뒷산의 풍수지리설에 금오형이라 한다. 등으로 길게 뻗다가 다시 우뚝 솟은 것이 흡사 까마귀 목과 같다 하여 오목이라 하였으나 나중에 오미기라고 불렀다.
웃샘뜸 · 환생촌 환생촌이란 새로이 부활한 작은 마을을 뜻하며 옛날 이 마을이 없어졌다가 다시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살고 있다.
절밑 유학산에 올라가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으며 옛날 유학산에 있는 절로 올라가는 중간위치에 있어 절 밑이라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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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문화과이형기054)979-6432
최종수정일 :
2015-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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